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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 윤흥길

by 예흐나 2023.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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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흥길  | 민음사 

 

  내가 기억하는 장마라는 소설은 언제나 수능시험 문제의 지문 속에 가끔 올라오던 일 뿐이다. 이 책 속에는 장마 뿐만 아니라 장마와 성격이 비슷한 다수의 단편이 같이 들어있는 작품 모음집이다.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보던 소설을 차근차근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더 없이 좋은 경험이었다. 사실 그다지 친숙한 작가가 아니었지만 그 특유의 분위기와 건조하면서도 몰입하게 만드는 문체에 끌려 작가의 팬이 되고 말았다.

 

  이곳에 담긴 소설에는 주로 우리나라 근대사의 비극 속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6.25로 대변되던 시절 어지러운 시국이라는 이름하에 가난과 긴장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러 편에 걸쳐 등장한다. 아들들을 국군과 인민군에 내어주고 대립하는 두 할머니의 ‘장마’나 땔감을 훔쳐내는 사람들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엮은 ‘땔감’, 이기적인 어른들에 의해 죄 없이 희생당하는 어린아이를 그린 ‘양’에서 잘 나타난다. 특히 ‘장마’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구렁이의 출현이다. 예전 국어시간에 배우던 것처럼 구렁이는 우리나라 토속적인 한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읽는 독자로서는 때아닌 구렁이와 구렁이를 대하는 두 할머니의 태도에서 우리나라의 토속 신앙을 엿볼 수 있으며 특유의 신비스러움까지 느낄 수 있다.

 

  또한 아이의 시점으로 쓰인 소설이 여러 편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러다보니 작가의 별 개입이 없이 아이의 눈을 통한 묘사만으로도 독자는 장면의 숨은 의미를 알아챌 수 있다. 담담한 아이의 묘사는 그 비극성과 절박함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마지막으로 내가 발견한 또 하나의 특징은 다수에 의한 횡포와 잔인함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주변인들의 생각 없는 호기심에 투신자살하는 주방장의 ‘몰매’와 한 사람의 죽음을 영웅적이게 몰아가는 ‘빙청과 심홍’, 어린아이를 향한 어른들의 탐욕이 소름끼치는 ‘기억속의 들꽃’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책속에서만 볼 수 있는 우리의 근대사에는 굵직한 사건들만 있었던 게 아니다. 그 속에서 울고 웃는 서민들이 있었고, 배고픈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을 기억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을 때 우리 근대사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가 조금이나마 엷어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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